대천덕 신부 복음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 준 성직자 대천덕 신부는 1918년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미국 남부대학(University of the South) 신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1946년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of USA)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957년 한국으로 파송되어 성미가엘신학원(현재 성공회대학교) 재건을 위해 정착하였습니다. 1957년 11월 성미가엘신학원 6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1964년까지 원장으로 봉직하였습니다. 1965년에는 강원도 태백에 수도원 공동체인 ‘예수원(Jesus Abbey)’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의 융화로 한국 전통을 존중하였고, 예수원을 한국을 대표하는 공동체로 키워냈습니다. 2002년 향년 84세로 영면하기까지 예수원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설립한 예수원은 지금도 한해 1만여명이 방문하는 공동체로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사회 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저서로는 「대천덕 자서전, 개척자의 길」, 「대천덕 신부가 물려준 신앙실천서」,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경제정의」 등이 있습니다.
구두인 신부 이 땅에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진정한 성직자 구두인 신부는 1913년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의 법률가 집안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성직자가 될 꿈을 안고 1939년 미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공회신학원에 입학하였고 3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성공회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미국 성공회는 구두인 신부를 1960년 9월 한국 성공회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는 대한성공회 ‘성미가엘신학원’에서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에 힘썼습니다. 대한성공회는 캐나다 성공회가 보내준 5만 달러의 기금으로 지금의 구로구 항동에 1만 1천 평(36,363㎡)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고, 1961년부터 본격적인 성직 후보자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의 교수진 중 한 명이 구두인 신부였습니다.
그는 신학자로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데도 큰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성장하여 사회의 역군이 된 사람들은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등지에 100여 명에 이릅니다. 그의 양아들 조용해氏(성공회대학교 직원 정년퇴임)는 “구두인 신부님은 이 땅에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진정한 성직자였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1997년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제3묘역(성공회 구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김성수 주교 그가 행한 나눔과 섬김의 정신은 성공회대학교는 물론 지금도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 김성수 주교는 1930년 강화군 온수리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와 성미가엘신학원(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964년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974년부터 발달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 후 1984년 성공회 주교 서품을 받았습니다. 1987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시절에는 정동에 있는 서울주교좌교회에서 6·10 국민대회의 서막이 된 ‘4·13 호헌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함으로써 6월 민주항쟁에 함께 했습니다. 서울 상계동 철거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시작된 ‘나눔의 집’, 외국인노동자 쉼터인 경기도 마석 ‘샬롬의 집’ 등이 모두 그가 교구장으로 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김 주교는 은퇴 후에 물려받은 땅을 기부하며 1999년 강화도에 발달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우리마을’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2004년부터 8년간 성공회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등록금을 낭비할 수 없다”며 판공비를 모두 반납하였습니다. 또한 한 달에 한 번 대학교 식당에서 ‘자취생을 위한 저녁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행한 나눔과 섬김의 정신은 성공회대학교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 지금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신영복 교수 개인의 존재를 넘어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 ‘더불어 숲’을 이루는 것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습니다.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는 한학자 정향 조병호 선생의 지도를 받아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을 한글에도 응용해 연대체라는 글씨체를 만들었습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1998년부터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2006년 정년퇴임 이후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은 개인의 존재를 넘어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 ‘더불어 숲’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 가져야 할 삶의 철학을 남겨주었습니다. 2016년 별세했으며, 이후 성공회대학교 뒷산인 항동 산 23-1번지 일대에 ‘신영복 추모공원’과 480m 길이의 ‘더불어 숲길’이 조성되었습니다. ‘더불어 숲길’에는 생전에 직접 쓴 서화작품 31점이 안내판 형식으로 설치되어 있고, 구로 올레길, 항동 철길, 서울푸른수목원과 연결되어 주민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처음처럼」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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